가족의 추억

Beejei
4 min readJun 10, 2024

--

엄마는 33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내가 중1때였으니 무던히도 이른 나이에 시집을 오셨었나 보다. 5년여의 시간을 암을 이겨내려고 부던히도 노력하면서, 1년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병수발까지 하면서, 금식 기도를 하고 생명 연장을 위해 여기저기 관을 삽입하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돌아가셨다.

10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때의 나는 가난을 알지는 못했다. 끼니를 거르지 않으니 그냥 적당히 사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누나와 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여섯이서 잘 살 줄 알았다. 10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가 낙상사고로 입원하시기 전 까지는.

당시에는 의료기술이 잘 발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낙상사고로 골반이 망가졌다. 지금은 수술하고 재활을 하면 될 것도 같지만, 당시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누워만 계시다가 근육은 쪽 빠지고 욕창에 시달리면서 돌아가셨다. 같은 시기 엄마는 자궁암이 발견되고 난 뒤로 병원에 단기로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하거나,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 역시도 지금이라면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로 치료를 하겠지만 당시는 그런 시술이 없었다. 집에는 아픈 사람들로 가사는 할머니 혼자 하시는 시간이 많았고 할머니는 틈만 나면 신세 한탄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일이 생기는 지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엄마의 가장 기억이 나는 모습은 새벽에 깜깜한 거실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이었다. 방언도 중간중간 나오면서, 한번 기도를 하면 두 시간을 넘게 절절하게 기도했다. 기도를 하는 엄마에게는 잠깐이라도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엄마가 집안의 유일한 환자가 되었다. 앙상한 몸으로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부축을 받으며 집안을 간신히 돌아다녔다.

엄마가 그래도 걸어 다닐 수 있을 때는 시내의 여성회관을 다니면 난을 키우는 수업을 들었다. 난 화분이 하나 둘 늘어나다가 이윽고 베란다를 가득 찼다. 일 주일에 한 번씩 난에물을 주기 위해 나에게 화장실로 난을 모두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셨다. 누나도 나도 입이 삐죽 나와 억지로 옮기면 샤워호스로 골고루 물을 주며 즐거워하셨다.

몸이 불편해져 거의 누워 계신 후로는 평일 아침마다 보온병에 커피를 만들어 나에게 들려 보냈다. 부모로서 신경을 하나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아이를 잘 봐주시라 드렸던 작은 뇌물 이었으리라.

엄마는 곧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아버지의 절규 섞인 눈물을 보았다. 철없던 나에게도 1년 사이 6명이었던 가족이 4명이 된 것이 꽤나 큰 충격이었다. 가장 나이 많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팠던 엄마가 돌아가셨으면… 그 다음은 누구지? 언제 일어나는 거지? 누군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 것도, 내내 환자를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상복을 입고 초상을 치르고 영구차에 타는 것도, 절을 갈지 교회를 갈지 알 수 없는 것도 모두 다 싫었다.

지금 회상해보면 내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엄마의 고통을,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아픔을, 철없는 아이들과 육아에 영 믿음직하지 않은 남편을 두고 가야 하는 답답함을 같이 이야기하며 나눌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고, 죄송스럽다. 반면 이제서야 나도 철이 약간 든 것 같으니 이런 면에서는 성장이 참 더뎌도 너무 더디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엄마처럼 큰 병을 얻은 것 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그 끝없는 답답함에 새벽까지 괴로워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답답함. 바뀌지 않을 것이 자명한 가족. 물러설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가족이라는 굴레. 아무리 얘기해도 전달되지 않는 공허한 대화. 과거의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기에 누군가를 어찌 탓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그냥 아직 어른이 덜 된 것일까.

엄마를 따라서 갔던 오산리 기도원은 마치 피난소 같았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있다가 하루에 네 번 예배를 보고, 미숫가루 비슷한 곡류로 만든 죽에 꿀을 섞어서 먹었던 것 같다. 길을 걷다 보면 공중전화 부스 크기의 독채에서 커다란 기도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본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간절함을 해소했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와 무엇이 다르기에 그때보다 답답하고 힘든 것일까.

작더라도 안식처가 있었으면 좋겠다.

--

--

Beejei
Beejei

Written by Beejei

Writing for the better world. Let's give us time to recover, time to understand.

No responses y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