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미술학원에 보내고 근처의 카페에서 책을 읽고 싶었다. 4개의 카페 중 문을 연 곳은 한 곳 밖에 없다. 다른 세 곳은 Open펫말을 붙이고도 문이 잠겨 있다. 문 앞에는 쿠팡프레쉬에서 배송된 물품들이 두세개 씩 쌓여 있다. 유일하게 문 연 곳은 타르트와 케이크 전문점 같아 보인다. 밖에서 보았을 때 너무 어두운 조명이 문을 열기에 좀 망설이게 만들었다. 아, 실내는 그래도 적당히 환하구나. 들어와서 깨닫는다. 2주 전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 카페다. 급하게 아메리카노만 들고 나가버리기는 했지만, 동유럽의 소품을 보이는 찻잔들과, 모래에 로스팅하는 것으로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에스프레소 컵을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어제 밤에 간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기분이 평소보다 감상적인 것 같다. 메뉴를 한참 보다가 돌체 라떼를 주문했다.
테이블은 제각각 높이도 다르고 넓이도 다르다. 의자도 내 몸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높아서 걸터앉아야 하거나 불편하게 등을 기대야 하는 좁은 의자들, 혹은 책을 읽기에는 너무 누워버리는 소파만 있다. 그 중 그나마 가장 보통 테이블 의자에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외투를 벗고 잠시 트위터를 살펴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커피를 서빙해주신다. 작은 타원 쟁반에 하얀 천으로 아담하게 꾸민 컵받침에, 직접 빚은 듯 한 소박한 자기 컵에 담긴 작은 하트 모양 라떼 아트. 향긋하고 달달한 커피향에 기분이 좋아진다.
트위터를 조금 더 보다가 실내에 있는 식물들에 눈이 간다. 내가 앉지 않은 소파 자리에 하얀 벽을 배경으로 길게 뻗었다가 늘어진 초록색 이파리들이 멋진 구도를 만들어낸 것 같다. 사진을 찍고 싶지만, 왠지 누가 될 것 같아 한참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문득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노트북을 꺼낸다. 천장 전등이 붙어 있는 레일에도 6개의 화분이 있다. 약간씩은 모양이 다른 것 같지만 등나무 덩굴 같다. 1미터 내외로 늘어져 있지만 생기있는 모습이다. 보통 때라면 눈에 거슬린다고만 생각할 것 같은데, 어렸을 때 집에서 등나무 덩굴을 키우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보고 싶다.
30평의 아파트는 어린 나에게는 그럭저럭 넓은 공간이었다. 기어도, 굴러도, 공간이 없어서 힘들다는 느낌은 가진 적이 없다. 아마 당시에는 침대가 없어서 더 넓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가장 작은 방에 서랍장들과 함께 구석의 작은 책상을 놓는 자리가 주어졌지만, 사실 그 자리에서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공간에 대한 답답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6명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을 해 보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느꼈을 부대낌에서 오는 힘듦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시부모의 식사와 이부자리를 챙기고, 집안 대소사를 맡아서 해야 했던 어머니를 생각해보면 약간 마음이 아파온다.
엄마는 난을 참 좋아했다. 다니던 교회 말고 여성 YMCA회관을 다니며 유일하게 티가 나는 취미를 가졌던 게 난을 키우는 것이었다. 베란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20여개의 난 화분을 바라보는 게 당시로써는 어떤 즐거움인지 몰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욕실로 옮겨서 물을 주라는 심부름이 귀찮고 싫을 뿐이었다. 난은 일년 내내 키워도 꽃이 피지 않는다. 그냥 천천히 한 두 뿌리씩 시들다가 비워지는 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등나무 화분을 거실 선반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등나무 화분은 처음에는 별로 신기할 것 없는 이파리들 같았지만, 일 주일이 무색하게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라나갔다. 당시 베란다가 남향이어서 그런지 계절을 타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 한 10cm정도 자라게 되면 자꾸 아래로 늘어져서, 옷핀을 한 두 개 벽 도배지에 끼워서 고정시키고는 했다. 이것도 내 일이었다. 가지가 여기저기 뻗어나면서부터는 일이 갑절로 느는 듯 했다. 천장 한쪽 귀퉁이에서 시작된 등나무 덩쿨이 1년 후에는 거실 천장 전체를 덮어버렸다. 신기하기도 하지만 약간 기괴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YMCA활동이 끝나갈 때 쯔음, 좀 특이한 난을 하나 만들어가지고 왔다. 기다란 돌에 붙어 있는 난을 가지고 왔다. 뭐라고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습은 가장 그럴 듯 했다. 그 난은 신기하게도 늦겨울에 작고 하얀 꽃이 피었다. 이건 너무 무거워서 분무기로 매일매일 물을 주어야 했다. 그래도 옮기지 않아도 되어서 썩 마음에 들었다.
그 집에서는 학교를 갔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그냥 맞고 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운동회를 하면서 점심을 먹기 위해 집까지 다녀와야 했고, 영문은 모르지만 아침마다 엄마가 만들어 준 보온병의 커피를 선생님께 가져다 드려야 했다. 그 집에서는 엄마가 기도원을 가다고 며칠씩 집을 비우지 않았다. 대신에 언젠가부터 침대에 오래오래 누워 있었다. 매일 커피를 잘 마셨다고 하던 선생님이 엄마를 보고 싶다고 찾아 오셨고, 그날은 엄마 대신 내가 커피를 만들었다. 그 때는 머그잔이 거의 다 차도록 물을 넣었다.
오늘은 아이에게 커피 만드는 법을 알려주어야겠다. 책은 결국 꺼내지 못했다. AI 공부는 내일부터.